신년 계획을 세우면서, 게임과 관련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레플리카를 만들고 출시했던 2016년, 2017년을 지나면서 나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적었고 직장생활에 할애하는 노력이 아까웠다.
그리고, 부족한 시간과 부족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부족한 애착을 불러 왔다.
가정에서 느껴지는 소원함이,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내 끝 없는 우울과 공허함이 모두 게임 개발 탓이라 생각했다. 소셜 미디어 공지사항에는 ‘올해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에 애쓰지 않고 나라는 사람이 다시 단단해질 수 있도록 보살피는 한 해로 만들어볼까 합니다’라고 게시했지만, 사실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가족과의 유대, 직장에서의 보람, 게임을 만들며 얻는 성취감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혼동하며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얻을 수 없다는 현실에 괴로웠다.
2018. 6. 1. 한양대학교에서 ‘도래하는 가상현실시대와 응전하는 사이버펑크’라는 주제로 내가 게임을 만드는 이유와 게임을 통한 공감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마 올해 처음으로 게임과 관련한 활동을 했던 때가 아니었나 기억한다. 나는 아직 혼란스럽고 내 철학은 미비하며 공감이라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했다.
파워포인트 고장으로 발표자료를 휴대전화로 학생들에게 공유했다.
오영진 교수님과 이융희 작가님
교수님은 참 젊으셔.
이 날 이야기를 나누었던 내용 중 일부분.
손탁은 ‘타인의 고통’이라는 저서에서 이와 같은 현상을 ‘전형적인 근대적 체험’이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공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죠. 그리고 그 이유에 관해 말합니다. 타자는 언제나 나의 밖에 있기 때문이며, 그 차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그래서 공감은 그만큼 불완전한 것이고, 타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는 방법도 없으며, 공감이 이루어지더라도 이는 순간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공감을 겪는 자신은 타인이 겪고 있는 위험이나 고통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안전감’이 필연적으로 공감을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나는, 2016. 7. 11. 레플리카(Replica)를 스팀 스토어에 출시했다.
당시 나의 나라는 문화예술계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좌편향을 문제로 지적했다. 영화, 문학 등 다방면에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야권 인사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낸 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었고 각종 불이익을 받았다. 국가에 대한 비판 혹은 이전의 민주 대통령에 대하여 호의적인 의도를 나타낸 영화는 그 제작에 참여했던 기업의 경영자가 퇴진 압박을 받았고, 코미디 프로그램의 정치 풍자 코너는 사라졌으며,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는 정부에서 영화표를 모두 수거해 가거나 악의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등 국가 전체적으로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불경시 되던 시절이었다.
[그림-1] 레플리카 출시 당시 시대적 상황(2017 BIC 강연자료 중 발췌)
레플리카는 이처럼 개인의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를 법치주의를 앞세워 폭압했던 현실에 관한 게임이다. 그리고 편향된 구조와 전체주의에 매몰되어 혐오를 강화하고 압제의 일원이 된 개인의 도덕성과 파시즘에 관한 이야기다.
레플리카를 출시한 이후, 국내 극우성향의 사이트에서는 내 게임을 “좌빨게임” 이라고 규정했다. 좌익 빨갱이, 즉 북한을 추종하고 공산주의를 경배하는 간첩이 만든 게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개꼴통 게임”, “만든 새끼 뭐하는 놈인지나 알고 싶다”는 비난 글과 리뷰가 쏟아졌다.
[그림-2] 레플리카 출시 후 반응(2017 BIC 강연자료 중 발췌)
하지만 출시 초기의 이와 같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레플리카는 많은 성과를 보여줬다. IndieCade, IGF 등 국내외 인디게임 조직과 행사에서 수상의 영광을 얻었으며, 스팀과 모바일 플랫폼에서의 판매도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관련 링크) 특히 ‘라스푸틴의 21세기 재현’이라고도 불렸던 인형사 정부가 교체되면서 국내에서의 내 게임에 대한 평가도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내 개인적인 사상과 신념으로 인해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위협받고 비난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전, 국내 게임사이트에서는 나를 “메갈”이라고 다시 규정했다. (관련 링크) 내 트위터 활동 내역을 확인한 바, 페미니즘과 관련된 뉴스를 리트윗 하거나 ‘마음에 들어요’로 지정해 둔 기록이 있다는 이유다. 위 링크에서 문제로 지적하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유머] [ 인디게임 개발자 SOMI ] “마음에들어요 “”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이 글에는 총 91개의 댓글(2018. 3. 28. 현재)이 달렸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위와 같이 지적된 내용들이 내가 메갈이라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메갈’이라는 단어가 통용되고 있는 의미를 고려할 때, 내가 과거 여성혐오에 대한 미러링과 페미니즘을 표방했던 ‘메갈리아’라는 사이트에서 활동했던 사람이거나, 남성혐오 또는 여성우월주의를 위해 각종 범죄와 반인륜적 행위를 저지르는 자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림-3] [유머] [ 인디게임 개발자 SOMI ] “마음에들어요 ” 게시글에 붙은 댓글 중 일부
내 트위터 사용 이력을 통한 사상검증 결과, 나는 아래 그림과 같이 “사실상 메갈로 확정”되었고, 내 게임에 대한 리뷰에는 “쿵쾅쿵쾅 메갈손!”, “멧퇘지”와 같은 혐오표현이 게시되기 시작했다. (멧퇘지는 ‘메갈리아에서 활동하는 멧돼지’를 줄인 표현으로 그 움직임에 대한 비하의 의미로, ‘쿵쾅쿵쾅’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4] 나무위키 레플리카 소개글에 추가된 내용[그림-5] 레플리카 스팀 리뷰에 추가된 모욕적인 평가들
이와 같이 한 개인 게임개발자에 대한 사상검증과 사이버불링이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고자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게임업계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표적인 사건들을 확인했다.
2016년 모 게임의 성우는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기재된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자신의 개인 트위터 계정에 게시했다. 여자는 가만이 앉아서 백마탄 왕자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다. 이 사진을 본 일부 유저들은 게임사를 상대로 해당 성우에 대한 교체를 요구했다. 해당 티셔츠가 메갈리아 사이트와 관련있는 메갈리아4 페이스북 페이지의 후원을 위한 티셔츠라는 이유였다. 이후 게임사는 성우를,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여러분의 우려 섞인 의견들을 확인하였다”는 문구와 함께 교체했다. (관련기사)
2018. 3. 25. 모 게임의 원화가가 개인 트위터로 여성단체를 팔로우하고 ‘한남’이라는 남성 비하단어가 포함된 글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일부 유저들이 항의했다. 원화가는 사과문을 게시하여야 했다. 해당 게임사 측은 원화가를 상대로, ‘왜 팔로우 했는지’, ‘왜 리트윗 했는지’ 등 개인의 가치관과 사생활 문제를 ‘심문’했고, ‘반사회적인 혐오 논리’, ‘변질되기 전 의미의 페미니즘’, ‘지속적이고 전사적인 교육’이라는 단어를 담아 그 내용을 공지사항으로 게시했다. (관련기사)
위 각각의 사건들은 구체적인 발생 경위에 다소 차이는 있으나, 모두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특정 집단 혹은 조직으로부터 억압받았다는 것, 개인의 신념과 사상을 이유로 노동권과 인권을 침해 당했다는 것, 그리고 이 억압과 침해가 이를 지켜보는 다른 주변인들에게 유무형의 불이익을 두려워하게 하고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게임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나에게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레플리카를 출시할 당시 얻었던 “빨갱이”라는 낙인과 유사한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을 사찰하여 낙인을 찍는 과정은 게임 레플리카에서 잘 드러난다.
[그림-7] 레플리카에서 주인공에게 빨갱이 낙인을 주는 증거_2(총2장, 1.체게바라 티셔츠, 2.평가)
즉, 1. 개인의 사상을 검증하고, 2. 빨갱이, 혹은 메갈이라는 단어로 낙인을 찍고 그 단어의 부정적 의미를 통해 개인의 사상 전체가 편향되었다고 호도하며, 3. 고용관계를 빌미로, 혹은 생존권, 노동권을 겁박하여 사상의 전향을 강요하고, 4. 낙인에 대한 두려움을 조성함으로써 사상과 신념, 사생활과 표현의 자유 이전에 자기 검열이 이루어지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활동인 것이다.
지난 7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서울대학교에서 서울대, 프랑스대사관, 독일문화원 주최로 개최된 MIND <RE>SET 게임잼 워크숍. 게임잼을 시작하기 전 게임 개발자 및 아티스트 등이 모여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토론하며 게임잼의 방향과 방법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난민, 특히 탈북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가장 첫 질문이 왜 탈북자는 난민(Refugee)라는 단어 대신 탈주자(Defector)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난민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편견, 그들의 이주 원인과 수용(적응)의 방식 등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하였는데,
2016년 올해의 작가상 수상 후보였던 함경아씨께서 <악어강위로 튕기는 축구공이 그린 그림>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 영상을 소개해주었다. 탈북 소년이 축구공으로 페인팅을 하는 퍼포먼스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축구공을 때리는 소년의 발길질과 그 궤적을 그리는 페인트가 조화되어 북한을 탈출한 소년이 겪었던 고난의 여정과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되도록 글을 올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글을 적고 몇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본 그것들은 대부분이 푸념이거나 자조 섞인 우울증이었다. 적은 글들을 다시 지우고 또 새로운 글을 적고, 지우고. 그렇게 몇 번을 되풀이하다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내 낮은 곳에 있는 슬픔이구나.’
돌이켜보면 내가 만든 게임도 마찬가지다. 게임을 만들면서 항상 하는 고민은, ‘왜 신나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까’였다. Rabbit Hole 3D, RETSNOM, 그리고 지금 만들고 있는 Replica까지… 모두 어둠 속으로, 깊은 수렁 속으로 침잠해가는 느낌이다.
이 슬픔의 덩어리들이 내 속에서 빠져나온 뒤, 나는 행복해졌는가? 어쩌면 게임이라는 것도 내가 찾던 답은 아닐지 모르겠다.